지금의 제 헤어스타일은 짧은 단발입니다. 단발로 자른 지는 얼마 안 되었구요. 거의 6년 동안이나 긴 파마머리를 고수해 왔었답니다. 과거 학창시절 저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제가 8년 동안이나 짧은 상고머리를 하고 있었단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랍니다. 완전히 남자 머리 스타일이었으니까요. 사진을 보여줘야 겨우 믿더군요. 왜 저는 머리를 그렇게 짧게 자를 수밖에 없었을까요?


- “머리 짧게 안 자르면 껌에다가 유리 섞어서 씹게 해 줄 거야!!”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제 초등학교 시절의 전성기였습니다. 친한 친구들의 지지와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나날이 승승장구하던 제게 그런 시련이 닥쳐올 줄은 정말 몰랐지요. 당시 저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예쁘게 묶고 다녔었는데(머리만 이뻤어요. 머리만.^^), 6학년 선배들 눈에는 그게 참 꼴사납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껌 좀 씹고, 침 좀 뱉을 줄 안다는 6학년 선배 몇 명이 각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친구들을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야!! 너네 여자얘들!! 낼부터 머리 짧게 자르고 와. 옷도 체육복만 입고 학교 와. 교문에서 검사할 거야. 안 그럼 혼나! 니네 껌에다가 유리 섞은 거 씹어 봤어?? 그거 씹게 해 줄테니! 중학교 언니, 오빠들이 와서 가만 안 둔댔거든? 선생님이나 엄마, 아빠한테 말만 해봐 아주. 어떻게 되는지 알지?”

이런 말을 내뱉던 여자 선배 한명하고 눈이 따악 마주쳤을 때, 어찌나 소름이 끼치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지만, 당시 여자 친구들은 모두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답니다. 중학생들까지 대동을 한다니 어찌 겁이 안 날까요. 그 선배의 말대로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일러바칠 엄두도 내질 못했죠.

  날라리 선배들이 돌아간 뒤, 교실은 친구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찼습니다.

  “어떡하면 좋아. 난 머리 자르기 싫어!!!”

  “어떻게 맨날 체육복만 입고 다녀!!”

  “그래도 어떡해. 유리를 씹히겠다잖아.ㅜㅜ”


- 결국 머리 잘랐더니...

  저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이 일을 어떻게 하나 고민을 했지만 도통 답이 나오질 않더군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일 끝나고 돌아오신 엄마에게 대뜸 머리를 잘라 달라고 했지요.

  “갑자기 왜? 자르자고 해도 안 자르더니?”

  “그냥, 그냥 자를래. 무조건 자를래. 잘라줘!!! 응?응?”

엄마는 그렇잖아도 너무 긴 머리 거추장스러웠는데 잘 됐다며 가위를 가지고 오셔서 제 머리를 싹둑 자르시더군요.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가 잘려 나가는데 눈물이 날 지경이었답니다. 댕강 잘려진 머리. 미용사가 아닌 엄마가 잘랐으니 모양은 오죽 했을까요. 며칠 뒤에 미용실 가서 다시 다듬긴 했지만, 그 다음날은 엄마가 잘라주신 그대로 학교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갔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반 대다수의 친구들이 체육복을 입고 왔고, 머리를 짧게 잘랐더군요. 물론 그 중에서도 예쁘게 옷 입고, 긴 머리 그대로인 간 큰 친구들도 있었지만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를 협박했던 그 선배들은 어떤 용감한 학생의 신고(?)로 선생님들에게 걸려 무지막지하게 혼나고, 저희들은 체육복이 아닌 평상복을 다시 입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괜히 머리 잘라버린 사람들만 우스워진 결과가 됐지요. 아, 지금 생각해도 그 머리 너무 아깝습니다. 어째서 그때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바로 머리를 잘라 달라고 했을까요. 너무 순진했어요. 그런데 참 우습죠? 그때 이후로 짧은 머리가 맘에 들어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머리를 기르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처음에 머리를 잘랐을 때보다도 더 짧은 상고머리를 고수했지요.


<출처 : 네이버 영화, '애자' 중 한 장면>



- 짧은 머리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

  처음 머리를 자른 이후, 제 머리는 날이 갈수록 짧아졌답니다. 하루는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여자 선생님 한분이 제 뒷모습을 보시고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너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면 어떡하니!!”

제가 고개를 돌리며 선생님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여잔 줄 아시더라구요. 어찌나 황당하던지. 선생님은 괜히 남자로 오해했던 게 미안하셨던지 짧은 머리가 참 잘 어울린다면서, 남자로 태어났더라도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 무척 많았을 것 같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해 주시더군요. 그 이후로 너 같은 얘가 남자친구였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말을 유독 많이 들어야만 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였는데, 평상시보다 더 짧게 머리를 자르고, 학교에 갔습니다. 스포츠머리에 도달하기 바로 전 상태의 ‘짧은 머리였죠. 음악시간이었는데, 선생님께서 제 머리를 탁탁 치시면서

  “야! 너 군대가냐? 머리를 왜 이렇게 짧게 잘랐어? 지금 너 나한테 반항하는거야?”

라고 짜증을 내시더군요. 물론 반 아이들은 엄청 웃어댔지요. 평상시에도 짧은 머리였긴 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머리가 짧게 잘려서 아마 더욱 남자 같이 보였을 겁니다. 평상시에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저를 곱지 않게 보셨던 탓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도 짧은 머리를 고수했었답니다.


- 지금 나는..

  오랜 커트 머리에 질린 저는 대학에 올라가자마자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단발인 상태에서 머리를 기를 때도 자꾸 잘라버리게 된다는데, 저는 오죽했겠습니까. 커트인 상태에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으니, 다듬어도 참으로 지저분하더군요. 그래도 결국 머리를 기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머리가 짧았던 날에 대한 한풀이를 하듯이 머리를 지지고 볶고, 난리법석을 떨었지요.

  몇 달 전쯤, 그동안 길었던 머리를 자르고 어깨 위 단발로 헤어스타일을 바꿨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개인적인 일로 기분이 매우 안 좋아, 헤어스타일을 바꿔보자는 생각에 단발로 싹둑 잘랐더니, 주변 사람들이 다들 몽실이 같다면서 놀려대더군요. 역시 기분따라 마구 머리를 자르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가끔 학창시절, 짧았던 머리가 그립기도 합니다. 때로 다시 확 잘라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긴 하지만 아마 지금 그런 머리를 하면 분명 후회할 것 같네요.^^ 저도 이제는 더 이상 남자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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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언제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타 보셨나요? 전 중학교 1학년 때 난생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타 보았답니다. 초등학교(저 다닐 땐 국민학교였지만...^^)때는 물론이고 중학교 때까지도 집과 근처 동네가 생활권의 전부였습니다. 집, 학원만 왔다갔다 하고, 동네친구들하고만 어울려 노는 평범한 학생이었지요.


- 에버랜드 소풍 가는 날!!

  그러던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그날은 에버랜드(당시 자연농원)로 소풍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학교를 향했습니다. 아침 9시까지 학교에 집합하여 선생님들의 지휘 하에 단체로 에버랜드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가 보는 에버랜드!! 그곳은 환상과 꿈의 나라였습니다. 넘쳐나는 기상천외한 놀이기구들과 볼거리들, 화려한 퍼레이드. 몇날 며칠을 놀라고 해도 다 부족할 만큼 저에게는 멋진 동화 속 세상처럼 느껴졌답니다. 4시까지 집합하라고 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몇 분 남겨두고 집합 장소로 헐레벌떡 뛰어갔습니다. 한명도 빠짐없이 모인 것을 체크한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차례대로 시내버스에 태워서 집으로 보냈습니다. 아침에는 선생님과 함께 버스를 탔었지만, 집에 갈 때는 친구들과만 버스를 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 만원버스에서 못 내리다.

  에버랜드가 출발점이었던 그 버스는 정류장을 거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사람이 늘었습니다. 결국 버스는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가 되어 버렸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사람이 빽빽이 차 있었지요.

  “혜정아, 어디서 내리는지 알지?”

  “걱정 마, 난 혼자서 버스 자주 타 봤어. 자연농원 접때두 친구들하고 버스타고 갔었는걸.”

  “그래, 너만 믿어~”

  그렇게 한참을 갔을까요. 한참을 재잘대다가 친구가 내리자고 끌어당겨서 버스 출구 쪽을 향했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운전석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서는 그 많은 인파를 뚫고 지나가야 했습니다. 친구들이 겨우 빠져 나가고 제가 맨 끝에서 뒤 따라 나가던 순간, 문 앞에 있는 큰 짐에 그만 발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에 버스 문은 속절없이 닫히고 말았답니다. 지금이라면 “아저씨, 잠깐만요!! 문 좀 열어주세요!!”라고 소리쳤겠지만, 그때는 버스에 혼자 남게 된 것이 처음이라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습니다. 그 다음 정류장에서라도 내리면 될 것을 전 바보처럼 발만 동동 구르며 그렇게 몇 정류장을 지나버리고 말았습니다.



- 5천 원 내고 버스 타다.

  바보 같이 그렇게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 지나친 지는 오래고, 내린 곳은 난생 처음 가 본 장소였습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얼른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도통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한적한 장소라 지나다니는 사람조차도 없었습니다.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버스에서 내린 반대방향으로 길을 건넌 후, 버스를 잡았습니다. 00로 가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간다고 합니다. 휴~ 이제 살았네요. 버스에 올라선 후, 요금을 내려고 지갑을 열었는데 이런!! 5천 원짜리 한 장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동전도 없고, 회수권도 없습니다. 버스 혼자 타는 것도 처음인데다가,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5천 원을 내밀었는데, 기사 아저씨 버럭 하시더군요.

  “학생, 동전 없어? 천 원짜리도 없어?”

  “네.. 없는데요.. 이것 밖에..ㅜㅜ”

  “거스름돈을 어떻게 줘야 해.. 휴우. 우선 거기 있어봐. 다른 손님들 오면 대신 돈 받는 수밖에.”

  아저씨는 버스 문을 닫고 출발하셨습니다. 아저씨도 황당하셨겠죠. 5천 원을 내밀면 거스름돈 주기도 곤란하고. 지금 같이 교통카드가 있었던 때라면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충전식 교통카드를 충전시키지 않아, ‘잔액이 부족합니다.’라고 떴던 경험도 있긴 하지만.^^;; 전 너무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죠. 아주머니 한 분이 천 원짜리로 돈을 바꿔주시려고 지갑을 뒤적이셨는데, 개수가 모자랐는지 그만 포기하시더라구요. 그때 그 아주머니 뒤쪽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 한분이 제 앞으로 오시더니 대신 버스 요금을 내 주셨습니다.

  “학생, 요금 냈으니 이리 와서 앉아.”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전 거듭거듭 인사를 하고 빈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요금 받는 곳에 서서 거스름돈 다 채울 때까지 손님들 요금 대신 받을 뻔 했습니다.


  요금 대신 내 주셨던 아저씨는 다행히도 제가 내린 버스 정류장과 같은 곳에서 내리시더군요. 사실 어디서 내려야 할지도 잘 몰랐었거든요. 친절한 아저씨 덕분에 버스도 잘 타고, 집도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어리버리한 중학교 1학년 학생의 좌충우돌 버스 탑승기는 그렇게 해서 막을 내렸답니다.

  지금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고는 생활이 되지 않을 만큼 생활권이 넓어졌습니다. 그런 지금도 가끔 버스를 잘못 타거나, 딴 짓하다가 엉뚱한 정류장에서 내리곤 하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제는 교통카드 겸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니니, 5천 원 내고 당황할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진 않는군요.^^ 요즘엔 돈을 내고 타시는 분들이 거의 없는데, 아침에 버스 타고 오다가 동전 넣으시는 분 보고 옛날 어리버리했던 그 날이 떠오릅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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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쏠트[S.S]
 

  요즘 몸이 부쩍 쇠약해지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안부전화를 드렸습니다. 70이 넘어서까지도 정정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이제는 목소리에서부터 피곤함과 힘없음이 묻어나옵니다.

  “할아버지, 저 쏠이예요. 저녁 진지는 드셨어요? 몸은 좀 괜찮으시고요?”

  “오냐, 나야 뭐 늘 좋다. 너거들은 우짜냐. 집안은 두루두루 평안하고?”

  “그럼요. 저희 걱정은 마세요.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휴가라도 내고 한번 내려가야 하는데.”

  “워메, 됐다. 바쁜데 어딜 내려오냐. 우린 괜찮다. 잘 지내그라.”


-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살던 어린 시절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 저와 동생은 어린 시절을 할아버지 댁에서 보냈답니다. 물론 1년 정도의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요. 당시 부모님은 제주도에서 수도권으로 갓 올라와 앞으로 살 기반을 마련하시느라 고생을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저희들을 할아버지 댁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런 사정을 딱히 여겨 저희들을 맡아 주셨답니다. 철없던 그 시절, 참 무던히도 할아버지, 할머니 속을 많이 썩였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속 타는 것도 모르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어린 녀석들이 밤 늦게 시골길 돌아다니고, 물가에서 장난치다가 물에 빠져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시골에 살면서 자연이 주는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댁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있었고, 갖가지 야채들도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동네 빨래터와 함께 있는 개울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 곤충을 잡기도 하였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자연과 가깝게 지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은 저희 집 마당에 있는 앵두나무예요^^>


- 앵두 따러 지붕 올라갔다가 할머니한테 매 맞고..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할아버지 댁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린 저희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햇살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빨간 앵두나무 열매였습니다. 앵두나무는 축사 지붕 바로 옆에 심어져 있었는데, 매우 크게 자라 축사 지붕 위에까지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앵두나무를 눈여겨보고 있던 저는 동생을 꼬시기(?) 시작했습니다.^^;; 누나와 함께 앵두를 타자고. 그럼 앵두 중 절반을 동생에게 주겠다며. 한 살 아래인 동생은 당시 누나 말이라면 그저 다 옳은 줄 알고 있었을 때입니다. 당연히 제 유혹에 넘어갔지요. 저와 동생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논에 나가셨을 때를 노렸습니다.

  “누나, 근데 앵두는 저기 지붕 위에 있는걸? 어떻게 따?”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저기 사다리 있잖아. 저거 벽에 대고 지붕에 올라가면 되잖아~~ 얼른 바구니 하나 가지고 와~.”

  “다치면 어떡해.ㅜㅜ”

  “아, 진짜. 안 다쳐!! 앵두 안 먹을거야?”

결국 저와 동생은 사다리를 가지고 와 벽에 걸쳐 놓고 지붕에 기어 올라갔습니다. 신나게 앵두를 따고 있는데, 할머니 오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차 싶었지만,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 있어서 내려올 수도 없었습니다.

  “이 녀석들아, 거기서 뭐하는거냐!!!!”

지붕 위에 있던 저희들을 발견한 할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셨습니다.

  “당장 안 내려와? 아이고, 내가 저것들 때문에 정말!!!”

내려가면 당장 맞을 것만 같아 무서워서 못 내려가고 있던 저희들을 할아버지가 달래셨습니다. 겁을 잔뜩 집어먹고 겨우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저희들을 붙잡으신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빗자루로 저와 동생을 사정없이 때리셨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어린 마음에 할머니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다 큰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니, 할머니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얼마나 걱정스러우셨을까요. 자식들이 맡기고 간 손주들 행여나 다칠까봐 노심초사하셨던 그 마음을 모르고 할머니가 나쁘다고만 했었던 어린 시절을 떠 올려 봅니다.


- 이제는 갚아야 할 때

  그렇게 정정하셨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제는 많이 편찮으십니다. 할아버지는 최근 큰 수술을 받으셨는데, 아직도 밤에 갑자기 숨쉬기가 곤란하다고 하십니다. 전화기를 통해서 ‘쌕색’하는 할아버지의 힘겨운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말씀하시기가 힘드실 거 같아 몇 마디 안 하고 금방 끊었습니다.

  할아버지 댁은 전라도 시골, 저희 집은 경기도입니다. 먼 거리이긴 하지만,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왜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했었는지... 광주에 살고 있는 동기가 놀러오라고 했을 때는 버스 타고 잘도 갔었는데, 왜 할아버지 댁은 그리 멀게만 느껴졌을까요. 어린 시절, 동생과 저를 그렇게 힘들게 돌봐주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은혜. 이제는 저희가 갚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조만간 휴가라도 내고 할아버지 댁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안부 전화도 좀 더 자주 드리고요. 늘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셨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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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날 일, 달 월~”

세 살배기 조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아버지께서 낭랑한 목소리로 천자문을 외우십니다. 머리가 희끗희끗,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젊음도 시간의 흐름에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지금은 조금 덜하시지만, 어릴 적 기억에 아버지는 참으로 엄한 분이셨습니다. 조그마한 잘못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죠. 신의 성실과 청렴, 강직함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오신 아버지는 저와 동생에게도 이러한 것을 요구하셨답니다.




- 풍선 껌 한 개, 포도 한 알 훔치고 벌 받았던 기억

  제가8살 때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주도에 잠깐 살았었는데, 이사간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무척 심심했었던 모양입니다. 집 근처 슈퍼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슈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풍선껌이 보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껌 한 개를 집어 주머니에 몰래 넣고 밖으로 나오는데, 슈퍼 밖 진열대에 있던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던지요. 주인 아주머니는 저를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은 듯 했습니다. 눈치를 보며 포도 한 알 떼어서 입에 넣었는데 그만 들키고 말았습니다. 곧바로 쫓아 나오더니 저더러 ‘도둑’이라고 화를 내셨습니다. 아까 껌 훔치는 것도 봤다고 하시면서. 제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주머니는 저를 앞장세워 곧장 저희 집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슈퍼 주인에게 거듭거듭 사과하셨고, 전 저녁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께 엄청 맞고 문 밖으로 쫓겨나 꽤 긴 시간 손을 들고 벌을 섰답니다. 그 뒤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짓은 저에게 상상도 못할 일이 되었답니다.


- 동생, 아버지의 저금통을 털다.

  저와 제 동생이 중학교에 재학 중이었을 때입니다. 당시는 매일매일 필요한 돈을 타서 썼기 때문에 용돈을 모아서 무엇을 한다는 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동생은 늘 풍족했습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 먹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샀습니다. 대체 무슨 돈으로 저럴 수 있나 궁금했지만, 그때까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답니다.

  아버지는 동전이 생기면 안방에 있는 작은 플라스틱 저금통에 저금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저와 동생에게 저금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며 돈의 중요함을 알리셨지요. 저금통은 유리 테이프로 꽁꽁 싸매져 있었고 저와 동생은 아버지께서 저금통에 동전을  넣으시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동안 모아 두었던 저금통을 열어 은행에 예금시키려던 아버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저금통 밑바닥에 작은 공간이 생겨 있었고, 돈을 빼낸 흔적이 있었습니다. 당장 저희 둘을 부르신 아버지는 저금통을 보여주시며, 사실대로 털어 놓으라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너무 엄한 아버지의 표정에 동생은 그만 자신이 저금통을 털었다고 실토를 하였습니다. 그 돈을 어디에 썼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동생은 맛있는 걸 사 먹고 친구들과 노는데 썼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저희들에게 청렴과 강직함을 가르치셨던 아버지는 꽤나 충격을 받으신 얼굴이었습니다. 한동안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조용히 안방에 들어가셔서 참나무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나오셨습니다.

  “내가 너를 잘못 키운 탓이다. 자, 이것으로 내 종아리를 때려라.”

아버지는 바지를 걷어 올리시고, 동생 앞에 섰습니다. 저희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저와 동생은 울면서 서로 자신이 맞겠다고 했습니다.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으시고 계속 때리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동생은 울면서 아버지의 종아리에 방망이를 가져다 대기 시작했답니다.

  “더 세게 때려, 더!!”

  “엉엉, 아빠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엉엉.”

한참이 지났습니다. 철없는 동생이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아버지의 다리는 파랗게 멍이 들었습니다.

  “아빠,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끝없이 눈물 흘리는 저와 동생 모습에 아버지는 저희들을 따뜻하게 안아 주셨습니다. 다신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후 동생 또한 다른 사람 물건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아버지처럼 동전이 생기기만 하면 저금하는 습관을 들여, 꽤 많은 돈을 모으기도 하였답니다.


- 에필로그

  아버지는 오늘도 조카를 무릎에 앉히고 천자문을 외우십니다.

  “00야~ 항상 올바르게 살거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거라.”

아무것도 모를 세 살짜리 조카는 그저 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즐거운 듯 웃기만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어릴 적 도둑질로 배웠던 뼈 아픈 교훈을 되새깁니다.

아버지! 아버지 덕분에 저희가 이렇게 바르게 자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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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쏠트[S.S]
 

  저녁에 친구와 만나서 밥을 먹고,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집 쪽을 향해 걸어가는데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갑자기 컹컹대며 개가 짖어댔습니다. 어제 영웅전쟁님 블로그에서 ‘별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데다가, 개 짖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예전 그 녀석 생각이 나더군요.


- 만남, 가족이 되다.

  녀석을 만나게 된 건, 고3 수능을 눈앞에 둔 때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빌라에 살다가 마당이 있는 현재 집으로 이사를 왔었습니다. 수능을 3일 앞두고 말이지요.^^;; 이사한 다음날 막내삼촌이 하얀 강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는 사람한테 얻게 되었는데 마땅히 키울 곳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으니, 우리 집에서 키우라고 하더군요. 얼떨결에 강아지는 우리 집에 맡겨지고, 그렇게 그 녀석은 우리 가족이 되었습니다.


- 너의 이름은 ‘진동’

  강아지는 하얀색 진돗개였답니다.

  “아빠, 이 강아지 이름을 뭐라고 할까요?”

  “진돗개니깐, 진동이라고 하자~”

  “진동이? 아, 촌스러~ 그게 뭐야~ 무슨 매너모드도 아니고..ㅋ"

  “진동이가 뭐가 어때서? 정겹기만 하구만. 진동아~~ 이리 오련~”

그렇게 해서 저희 집에 왔던 백구의 이름은 ‘진동’이가 되었습니다. 식구들 모두가 원래 강아지를 좋아하는 탓도 있었지만, 진동이는 유독히 식구들의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어찌나 재롱을 부리는지, 화가 나 있다가도 그 녀석을 보면 맘이 녹곤 했으니까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모두 밖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집에 오면 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동이가 저희 집에 오고 나서부터 빈집에 활기가 넘쳤답니다. 집 쪽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식구들 발자국 소리를 알아듣고 그때부터 낑낑대기 시작합니다.(진동이는 집안에서 키운 게 아니고 마당에서 키웠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꼬리를 흔들고 팔딱팔딱 뛰면서 가족들을 맞이하곤 했지요. 덕분에 빈집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공허함은 저에겐 더 이상 없었습니다.

  아침마다 집에서 남은 밥과 잔반을 섞어서 먹이를 주고, 가끔 산책을 시켰습니다. 진동이를 보면서 때론, 사람들보다도 더 제 맘을 알아주는 것 같아 그 녀석에게 혼자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했답니다. 물론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제가 힘든 이야기를 할 때마다 꼬리를 축 내리고 촉촉한 눈빛으로 저를 보면서 제 손에 코를 비비대곤 했지요. 외롭고 힘들었던 저에겐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 진동이를 습격한 장염

  진동이는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 다른 개와 짝짓기를 했고 추운 어느 겨울밤 귀여운 강아지 11마리를 낳았습니다. 얼마나 신기했던지요. 아침에 일어나 나가보니, 출산의 고통을 마친 진동이가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끼 강아지 중 한 마리가 다른 개들한테 깔려 죽어 있었지요. 새끼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건지 진동이는 눈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그게 사실 눈물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당시 녀석 눈에서 물이 흘러 내렸던 건 사실입니다.)

  새끼들 중 2마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곳에 주었답니다. 새끼 강아지 두 마리에게 각각 ‘희망’, ‘소망’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고, 그렇게 몇 달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진동이와 희망, 소망이가 모두 바닥에 늘어져 꼼짝도 않고 있었습니다. 급히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세 마리 모두 장염이라 했습니다. 주사를 놓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희망이와 소망이는 피똥을 누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진동이가 걱정됐습니다. 기도했습니다. 녀석을 살려달라고.. 가족들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진동이는 장염을 이겨내고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론 정기적으로 주사도 맞히고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답니다. 그렇지만 진동이는 그 후에는 장염을 두 번이나 앓았습니다. 그래도 모두 이겨냈지요. 그만큼 저희 가족과 질긴 인연이 있었던가 봅니다.




- 이별

  진동이는 정말 저희 가족 중의 하나로 그렇게 7년을 함께 했습니다. 당시 저는 취업을 하게 되어, 집에서 먼 충주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살게 된 것은 처음이어서 무척 외로웠답니다. 집과 진동이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매주 올라가서 식구들과 진동이를 보면서 기운을 내고 다시 충주로 내려가곤 했지요.

  그날도 어김없이 집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동생에게 전화가 오더군요.

  “누나. 누나.. 엄마가 진동이 다른 곳에 보냈어.”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키우기가 너무 힘들대. 더 이상은 개 못 키우겠대. 이제 우리 집에 진동이 없어.

갑자기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희 집에선 개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동물들도 키우고 있었는데, 동물들을 키운다는 게 손이 보통 많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당시 많이 편찮으셨고, 저랑 동생도 지방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저희가 집을 비운 사이 집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처분해 버리신 모양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보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진동이를 볼 수 없단 사실에 동생도 울고 저도 울었습니다. 저한테는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울고 웃고, 7년을 함께 했는데... 집에 가서 엄마한테 화도 많이 내고 한동안 녀석을 보고 싶은 마음에 많이 울었답니다.

 

- 이젠 추억으로 남은 그 녀석

  사실 동물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런 제 맘을 이해하지 못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정말 가족이자 친구였답니다.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아직도 길에서 진돗개들을 볼 때마다 우리 진동이 생각이 나곤 한답니다. 헤어진 지 벌써 3년이 넘었네요. 어제 영웅전쟁님 글을 읽으면서 녀석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제 기억 속에 예쁜 추억으로 남은 그 녀석. 오늘따라 진동이가 눈물나게 보고 싶습니다.


주말동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고 합니다. 늦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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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쏠트[S.S]